아버님의 살아 생전 모습을 담은 비디오
Eulogy (조사)
저희 아버님은 일제시대때 일본 경성에서 8남매중 6째로 출생하셨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가족이 모두 부산으로 이주를 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에선 한국어를 못쓰게하는터라 아홉살 한국에 돌아 왔을때는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하셨습니다. 한국인이 한국어를 못하는 터라 학교에선 왕따를 받으며 학창 시절을 시작했습니다.
청년이 되어 인천으로 올라와 미군부대에서 군무원으로 일을 시작하고 저희 어머님과 1962년 결혼을 하셨습니다. 약 10여년간 일을 열심히 하여 30대 중반에는 사업을 시작 하셨습니다. 인천우유 대리점을 했는데 시작 한지 얼마 안돼 우유에서 이물질이 나왔다고 뉴스가 나는 바람에 고전을 하셨습니다. 결국 사업은 망하고 10여년간 열심히 모아시작한 재산을 불과 1년도 안되 탕진을 하십니다.
그뒤 몇년후 조그만 구멍가게를 시작하십니다. 사업실패 휴유증인지 그때부터 술을 매일 드셨어요. 당시 어머니와 자주 다투셨고 어머니는 한탄을 많이 하시었습니다. 당시 저는 아버님가 이기주의 이고 술만 좋아하시고 남들한텐 한없이 다정하고 너그러웠지만 저희한텐 무섭고 무심한분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안걱정은 당연히 어머니 몪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무서운분이 아니셨어요. 언제나 언성으로 저희에게 겁만주었지 절 한번도 때린적이 없었거든요.
그렇게 몇년이 지나고 1979년 저희 친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미국에서 살고 계시던 고모님 두분이 한국에 나오셔 장례를 치르고 이민 초청을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형제분이 여섯분인데 세분은 가신다고 하셨고 세분은 남는다고 하셨어요. 저희 아버님은 안간다는 분중 한분이셨습니다. 이미 아홉세때 언어의 고충을 겪어 본지라 다시는 이민을 가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고모님들은 가시기전 여섯명 모두 초청을 할테니 오고 안오고는 당사자가 결정을 하라 하시고 형제분들을 모두를 초청 하셨어요.
어머니는 술고래인 아버지의 탈출구가 필요했습니다. 설득을 하셨지요. 그런데 통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몰래 아버지 증명사진을 가지고 이민 신청을 하셨습니다. 당시 형제 초청은5년정도 걸리는 터라 일단 신청해놓고 5년후 다시 설득을 하시려 하신것이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5년이 걸려야 하는 인터뷰 순서가6개월만에 와 버린것입니다. 아버님 출생이 일본 태생이라 일본 비자를 받아 순서가 빨라 진것이라 하더군요.
당시 아버님은 못간다고 하셨고 어머니는 미국이 좋다는데 애들을 위해 가보자고 하셨습니다. 아버지 한테는 전혀 통하지가 않았습니다. 고심끝에 어머니는 그럼 1년만 가서 살아 보자고 제안을 하셨어요. 1년 살고 싫으면 다시 돌아오자고 하셨데요. 결국은 그렇게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옵니다.
이민생활은 시작되고 1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아버지는 1년을 열심히 사셨습니다. 그런데 내린 결론은 미국에선 도저히 못살겠는 거였어요. 어머니는 또 설득을 하셨습니다. 1년살고 어떻게 압니까? 다들 좋다는데 2년만 더살고 생각해 보자고 하셨답니다. 그렇게 1년이 3년되고 3년이 5년되고 해서 아버지는 미국에서 37년을 사시게 됩니다.
저희 아버지는 미국와서 열심히 사셨어요. 어느 이민자 못지 않게 두잡뛰고 심지어 3잡까지 뛰면서 사셨습니다. 한국에선 기마이 이빠이 쓰시던 분인데 우리 먹여 살린다고 미국에 와서는 돈도 쓸줄 모르는 분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주 검소하게 사셨습니다. 하지만 중간중간 술 담배를 하셨습니다. 술을 많이 드셨고 어머니의 잔소리는 늘어만 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문제는 저희 어머니셨어요 어머니는 술좀그만 술 그만 하고 잔소리 하시면서도 어느세 부억에서 술안주를 만들고 계셨어요. 유난히 조기구이를 좋아 하셔서 조기는 집에 떨어지지 않고 매일 먹었던것을 기억합니다. 안주 잘만들어주는 아내덕에 술이 늘은것 같습니다.
제가 서른이 넘으니 그렇게 이기주위고 무서웠던분이 다정스러운분인지 뒤늦게 알았습니다. 아마도 불만이 있을땐 좋은것이 잘 안보이는 모양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한국에서 술마시러 가실때 저와 동생을 데리고 가시곤 하셨습니다. 본인은 친구들과 술하면서 옆자리에 저와 동생 앉혀놓고 회 한접시 사주셨어요. 또한 제 초등학교 하교길에 지나가는 저를 보면 꼭 불러 떡복기 한그릇씩 사주시곤 하셨습니다. 자식들을 잘 챙겨주는 분이었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62세때 은퇴를 하셨습니다. 일하시던 분이 일을 그만 두니 병이 나시더군요. 하루는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어요. 네 아버지가 이상하다. 제가 불이나케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뭐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알아 들을수가 없었어요. 깜짝놀라 병원 응급실에 모시고 갔습니다. 알고보니 중풍이왔고 언어와 기억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병원에선Speech Therapy 를 받으라 했고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려면 1년이 걸릴지 아님 평생 안돌아 올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3개월쯤 지나니 저를 알아보시기 시작했습니다. 말씀도 조금씩 하기 시작하셨구요. 그렇게 한 6개월 정도 지난 어느날 저한테 장기 한판 두자고 하셨습니다.
제가 어렸을때 아버지는 장기를 무척 잘 두셨습니다. 덕분에 저희도 장기를 배웠고 저희 3부자는한 30년 넘게 같이 장기를 두며 살았어요. 초창기엔 아버지가 훨씬 잘 두셨는데 풍을 맞을 당시에는 저와 동생이 조금 잘둘때 였습니다. 3번두면 제가 두번이기고 아버지가 한번 이기곤 했습니다. 그런데 정신도 제대로 돌아오시지 않은 분이 저하고 장기를 두자는 거예요. 참고로 저는 카카오 장기 4단입니다. 장기를 시작하고 잠시 고민을 했습니다. 기회를 봐서 제가 져 드려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잘 두시는거예요. 제가 최선을 다했는데 졌습니다. 그때 무척 기뻤습니다. 아버지 정신이 다시 돌아 왔다는것을 알았거든요. 장기 지고 기쁜건 그때가 처음이었던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Stroke이 오신뒤 술과 담배를 끊으셨어요. 그나마 술한잔 하셨을땐 말씀을 하셨는데 말이 너무 없으셨습니다. 가족들을 더 챙기셨고 묵묵히 뒤에서 웃고 지내셨습니다. 워낙 외로워 보여 그해 추석때 제가 술을 권해 드렸어요. 그런데 아버지 께서는 “아니다 됐다”. 하시더라구요. 그러면서 저한테 “내가 술마시면 네 엄마가 싫어 하쟎아” 하시는 거예요. 그뒤로 20년간 돌아가실때까지 한번도 술과 담배를 하신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은 빨리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큰 문제는 2년전 시작 되었습니다. 갑자기 소변은 마려운데 소변을 못보시는거예요. 응급실에 들어가 응급 조치를 하였습니다. 미국에선 치료 받는데 너무 더디게 진행되는 터라 한국 서울대 병원에 가서 전립선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아버지께 암덩어리 같은걸 봤는데 혹시 암일지 모르니 검사를 해보라는 겁니다. 아버지께서는 저한테 검사를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어차피 암이라도 치료를 받을 생각이 없으니 모르는게 낮다고 말입니다. 너무 단호하게 나오셔서 알았다고 했지만 병원엔 검사를 진행 하라고 했습니다. 결과는 방광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버지께는 모르는척하고 미국으로 함께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미국에선 본인 동의 없이 아무것도 못받쟎아요. 어쩔수 없이 말씀을 드렸지만 아버님은 수술을 완강히 거부 하셨습니다. 수술도 못하고 괜히 걱정만 끼처 드린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아버지 같은 상황이면 수술을 하지 않더라도 치료를 하며 살면 5년에서 10년을 더 살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때 저희는 감사를 드렸습니다. 아버지 병을 알게되어 저희한테 효도 할수 있는 시간을 주신거라고요. 그래서 함께 여행도 하고 매주 일요일이면 함께모여 점심식사를 하고 한국 드라마를 같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1년 반은 너무도 빨리 지나갔습니다. 후회 하지 않으려고 자주모여 좋은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가시고 나니 후회가 됩니다. 제가 아버지께 사랑한단 말을 한번도 못했거든요.
아버지는 약 한달전부터 숨쉬기를 힘들어 하시고 대변조정이 안돼기 시작했습니다. 다행이 고통을 못느끼셔서 힘들어 하지지는 않으셨습니다. 돌아가시기 하루전 제가 아버님 집에 잠깐 들렀어요. 그때만해도 이전때와 다른것을 몰랐습니다. 수염은 깍지 않았지만 베지밀도 마시고 제가 변을 닦아 드릴때도 웃고 계셨습니다. 제가 돌아온후 누님이 들러다고 합니다.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누님이 만들어온 수제비도 함께 먹고 즐겁게 지냈다고 합니다. 어머님이 아버지께 승환이가 변 잘 닦아줘요? 하고 물었더니 잘 못닦더라 하셨데요. 저는 깨끗히 닦어 드리려고 했는데 시간이 오려걸려 아버지는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날 자기전에 어머니께 처음으로 어께를 톡톡 치면서 미안하다라고 하셨답니다. 그리고 새벽에 하늘 나라로 가셨습니다. 아마도 어머님이 힘들까봐 저희가 힘들까봐 마지막 선물로 일찍 가신것 같습니다.
최근엔 헤어질때 꼭 제 어깨를 톡톡 만져 주셨어요. 고맙다는 말대신 하신겁니다. 저도 답례로 아버지 어깨를 만져 드립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가시기전 따뜻하게 한번 안아드리지 못한것이 후회가 됩니다. 좋은곳에 가셔서 편히 계세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1-year Anniversary.
상은 제삿상을 차렸지만 가족과 모여 예배 드리고 저녁 식사로 아버님 1주년 추도식을 마쳤다. 세운, 헤선과 헤린이는 샴페인에서 올라왔고 다혜, 지선이와 지운이도 함께 했다.
상차림이 제삿상이라 누님과 어머님의 약간의 의견차이가 있었지만 내년 부터는 밥과 국은 제외하고 제사분의기를 없애기로 합의했다.